사랑니는 왜 있고, 언제부터 빼기 시작했을까?

사랑니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어금니 뒤에 올라오는 세 번째 어금니예요.
사랑니가 똑바로 자랐다는 말이 듣기 어려울 정도로 똑바로 자라는 경우가 드물고, 심지어 관리도 어려워 충치도 쉽게 생기죠.
이렇게 삐뚤어진 사랑니는 통증도 유발하고 발치가 두려워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과밀, 잇몸 질환, 감염 그리고 주변 치아까지 손상시키는데  필요도 없고 관리도 어렵고, 도움도 안 되고 아프기만 한, 정말 문제만 일으키는 사랑니, 왜 있을까요?

과거 인류의 조상은 날고기를 뜯어먹고 견과류, 뿌리같이 씹기 힘든 질기고 딱딱한 음식을 대부분 먹어서
성인기에 이르면 치아가 닳고, 깨지고, 썩어서 빠졌는데, 딱 맞게 올라오는 튼튼한 지원군, 세 번째 어금니가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농업이 시작되고 시간이 흘러 먹는 음식이 부드러워져서 추가 치아의 필요성이 점점 사라졌고, 턱도 같이 점점 작아졌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대부분 조리된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서 턱의 힘이 강하지 않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죠.

진화로 짧은 기간 내에 작고 약해져서, 사랑니는 작아진 턱의 속도에 따라오지 못하고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 매복 형태로 남게 된 것이죠.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된 매복 사랑니를 가진 사람은 막달레니아 시대에 기원전 13,000~15,000년 사이에 살았던 유럽 여성인데, 이미 이때부터 턱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어요.

과거에 사람들은 사랑니 4개 전부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은 두 개, 한 개, 전혀 생기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오늘날 인구의 35%가 사랑니 없이 태어난다고 해요.
 
그렇다면 사랑니는 언제부터 빼기 시작했을까요?

1902년에 ‘노보카인’이라는 국소마취제가 도입되었는데, 도입되기 전에는 예방차원으로 사랑니를 뺀 적이 거의 없었어요.
사랑니에 문제가 생기거나 감염이 된 환자들은 고통을 안고 살아가거나, 진정제와 마취 없이 파내어야 하는 끔찍한 과정을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고 해요.
극심한 통증으로 누구에게나 무서운 절차였지만, 불행하게도 자격을 갖춘 의사를 찾기란 더 어려웠어요.
과거에는 전문 도구, 항생제와 같이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치과 기술이 부족해, 많은 사람들이 사랑니 감염으로 사망했는데, 1950년대에 드디어 항생제가 나와 감염으로 인한 사망이 극적으로 줄어들게 되었어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에요.
사랑니로 고통을 많이 받았죠.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이 23살에 1년 넘게 치통을 앓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나이대로 미루어보아 사랑니의 통증으로 예상되고 있어요.
그 외 몇 임금도 치통을 앓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발치했다는 기록은 없고, 치통을 없애줄 약재만 계속 찾았는데,
조선시대에는 치종청이라는 외과는 존재했지만 고름을 빼내는 간단한 수준이었어요.
치아와 관련된 치료는 외과적인 치료방법이 없었고 오로지 약재로 치료를 해, 치아가 썩어 빠지는 것으로 고통을 덜었다고 해요.

동의보감에 사랑니에 대한 이해 수준을 엿볼 수 있는데, “검은 닭의 수놈과 암놈의 똥을 각각 모은 것, 오래된 미투리(짚신 밑창) 이 세 가지를 약성이 남게 태워 가루 내고 여기에 사향을 넣어 뿌리면 한 달이 지나 치아가 생긴다”라고 적혀있어요.. 
말도 안 되죠..

1915년 11월 1일 윌리엄 쉐플리가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학 교실을 열면서부터 현대와 같은 치의학이 발전하게 되었고, 첫 사랑니를 발치했다는 기록은 1917년 12월 22일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윤치호가 쉐프리 박사 치과에 가서 오른쪽 깊숙이 자리 잡아 계속 통증을 일으키는 치아를 발치했다는 기록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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