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자 머리는 짧을까?

지나가는 남자들을 보면 머리가 긴 사람보다 짧은 사람이 대부분이죠. 

이는 전 세계적으로 문화, 인종 상관없이 대부분 남자들이 그래요.

우리는 여자는 머리가 길고 남자는 머리가 짧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죠.
머리가 길다고 느껴지면 미용실을 가서 자르지만, 길다고 느끼는 머리도 여자들의 단발보다도 짧은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남자들은 머리를 언제부터 왜 짧게 유지하는 걸까요?

최초의 이발은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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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날카로운 부싯돌과 굴 껍데기로 최초의 이발이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리고 기원전 3500년경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면도날이 발견됐죠.

고대 이집트에서 스타일 아이콘은 그 시대의 신이자 왕이었어요.

모든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은 가장 호의적인 신이나 왕을 모방하고는 했는데, 예를 들어 오시리스는 길고 뾰족한 수염을 기른 이집트 죽음과 사후 세계의 ‘신’이었어요. 저승 세계를 믿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에서 오시리스는 죽은 사람을 다시 깨운다고 믿어, 왕이 죽으면 가짜 수염을 장식해 오시리스를 닮게 만들었죠.


초기 이집트에서는 긴 머리와 두꺼운 수염이 신과 왕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남자다움’의 수준을 나타냈기 때문에 남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어요.

남자의 긴 머리와 두꺼운 수염은 성숙함, 다산, 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졌죠. 그래서 대부분 상류층이 머리와 수염을 길렀고 금, 보석과 같은 각종 장식으로 머리카락을 꾸몄고, 장식도 크면 클수록 좋아 크게 했어요. 
하지만 패션이 바뀌듯 털이 많은 모습은 이집트 귀족 내에서 오래가지 못했고, 이집트의 유행이 바뀌게 돼요.

고위층은 숭배와 위엄을 과시할 때 여전히 ‘긴 머리, 두꺼운 수염’을 선호했지만, 철저한 위생관념과 더위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남녀 상관없이 머리털을 짧게 깎거나 밀어버리고 가발을 착용했어요.

왕은 종종 보석으로 뒤덮인 면도기 혹은 면도기에 순금을 묻혀 사후 세계에 깔끔한 모습을 기대하며 면도를 했다고 해요.

그리고 머리털 이외에도 몸에서 나는 털은 매우 경멸했기 때문에 모든 털은 깎거나 뽑아냈죠.


고대 그리스 로마 때 남자도 긴 머리를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남자가 머리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면 사내답지 않고 여자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기원전 300년경에 ‘톤소르'(tonsors)라는 이발사가 도입되면서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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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남자들은 ‘아고라’라는 시장에서 머리와 수염, 손톱 발톱까지 다듬었어요.

아고라는 논쟁을 위한 사교장으로도 기능을 했는데, 남자들이 아고라에 모여 토론을 하면 그 근방에서 면도를 하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했을 거예요.

기원전 296년 그리스 식민지였던 시칠리아를 통해 로마에 이발이 소개되었고, 로마 시대에 이르러 이발소(Barbershop)가 남자들 사이에서 대중화되었다고 해요.
결정적으로 전쟁 때문에 긴 머리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엄청나게 떨어졌어요.

많은 남자들이 전쟁 중에 머리를 붙잡히거나 흩날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눈이 가리고, 부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가 퍼뜨린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어요. 당시에 전쟁과 같은 환경 때문에 이는 남자들 사이에서 흔하게 퍼졌어요.

그런데 아직 치료법이 없었고, 이는 다양한 질병이 확산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잘라야만 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짧은 머리는 대부분의 남성 패션과 마찬가지로 서구 군대에서 남성 스타일과 남성다움의 상징이 되었죠.

남자들이 머리가 짧은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 즉 기독교의 영향도 컸어요.

사도 바울은 머리카락은 남자에게 부끄럽고 여자에게는 영광이라고 기록했어요.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여자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무한히 기르도록 내버려 두는 반면 남자는 짧게 유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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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년에 태어난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Aosta)은 가톨릭 교회의 철학자, 수도사, 신학자 그는 스콜라주의의 창시자로도 인정받음. 그는 현재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1092년 캔터베리아의 대주교 안셀름은 머리를 자르지 않는 소녀처럼 머리를 기르는 남자들이게 축복 주기를 거부했다고 하죠.


산업혁명도 남자들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데 영향을 줬어요. 남자들은. 긴 머리로는 공장에서 일할 때 거슬리기 때문에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짧은 머리를 고수하게 돼요.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보면 짧은 머리는 남자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머리가 되었어요.


이렇듯 남자의 짧은 머리는 서양에서 시작된 문화예요.


동양 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 길이가 길었죠.
변발(辮髮)은 앞 머리털을 밀고 뒤 머리털만 남기고 땋는 몽골족(동호족, 선비족, 거란족)과 만주족(여진족)의 머리예요.
한족은 머리를 땋아 올려 관을 쓰는 것을 의관의 풍속으로 여겼죠.
우리나라 남자들은 땋은 머리를 하다가 결혼 후에는 상투를 튼 뒤에는 갓, 문라건, 조우관 등 두건이나 모자를 함께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동양권에는 그 당시 시대상 받아 들어졌던 유고 사상인 ‘신체발부 수지부모’,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터럭 하나라도 감히 훼손해선 안 된다는 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웬만하면 모발을 자르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어요.

동양의 경우는 모발의 길이가 성별과 무관 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왜 어느 순간부터 서양인처럼 머리를 자르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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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족이 세웠던 명나라가 여진족 국가인 금나라에 멸망되면서 청나라가 건국되고, 당연히 청나라는 한 족에게 변발령을 강요하였으나 머리를 땋아 올려 관을 쓰는 것을 의관의 풍속으로 여긴 한족은 맹렬한 반발과 저항했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두발의 문제가 아닌 전통과 민족성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머리 때문에 싸워도 결국 서양처럼 짧은 머리는 아니었어요.

이후 시간이 흘러 청나라 말기에 1911년 쑨원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전복시키고 중화민국을 수립해요.
 

청나라 말기에 쑨원은 중화민국 수립 후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신흥지식인들과 해외 화교등을 받아들이고 서양문물을 들였어요. 그리고 1912년 3월 5일 (공보(公報) 제29호를 발표) 청나라 압제의 상징인 변발을 중국 전역에서 모두 잘라버릴 것을 명하고, 남자의 긴 머리가 사라졌어요.


일본의 경우 1868년 1월 3일 메이지 천황이 메이지 정부를 세운 후 막부를 타도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복구해서 서양 문물과 관습을 받아들이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요. (문명개화)
 

일본의 경우 가마쿠라 시대까지는 머리를 길게 기른 형태였지만 무사들의 시대인 센고쿠 시대가 열리면서 내전이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일본 기후는 우리나라보다 여름에 더 덥고 습한 경우가 많아 갑옷과 투구를 쓰고 전투를 하다 보면 체온이 급격히 상승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론 갑옷을 벗으면 되겠지만 그 당시 갑옷은 벗기 쉬운 구조가 아니다 보니 그나마 투구를 벗어 머리를 식히는 게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당연히 머리카락이 많으면 열을 식히기 어려우니 그 당시 체온을 쉽게 떨어트리기 위해 투구를 고정하기 위한 뒷머리와 옆머리만 남기고 윗머리를 밀어버린 헤어스타일, 즉 ‘촌마게’를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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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은 전통적으로 ‘촌마게’를 하고 있었는데, 천황은 서구화의 명목으로 단발령을 전국으로 선포하나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어요.

그러나 메이지 천황은 서양 복식으로 옷을 갈아입고 본인이 먼저 머리를 짧게 잘라 국민 앞에 나오니 단발령을 반대했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어요.
 
한국의 경우 1894년 7월 이후로 온건개화파들의 주도로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 운동이 추진 돼요.

이후 음력 1895년 11월 15일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에서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명령했어요.

일본에서 단발령을 시행할 때 천황이 머리를 자르자 다들 따랐듯, 위에서 선례를 보여주기 위해 일단 고종과 순종의 상투를 자르고, 정부의 관료와 군인, 순건 등, 관인들이 차례로 단발을 했어요.

이후 상투보다는 단정하고 짧은 머리가 위생적이고 일상에서 작업 효율을 높여 준다고 선전하면서 음력 1895년 11월 17일 전 국민 대상으로 단발령을 실시하죠.

조선 사회에는 앞서 언급한 ‘신체발부 수지부모’ 효 이념이 공고하게 자리해서 단발령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고 해요.

당시 민간에서 저항이 그토록 격렬했던 것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유교적 이념, 사전 예고 없이 돌발적이고 강제적이었던 이유가 컸죠.

김홍집 내각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의 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한 틈을 타 고종(高宗)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그에 따라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였고 단발령 문제는 개인의 자율에 맡겨지면서 일단락되었어요.

대한제국 선포 이후 스스로 본격적인 서양풍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양 풍속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줄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박은식 등 유학의 개신을 주장하는 청년 유림들이 등장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1900 근대화의 일환으로 2차 단발령이 시행되었죠, 1901년부터 한성부, 평양부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이발소가 유행하기도 했어요.

민중들도 스스로 근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을뿐더러 청년 유림들이 상투를 유지하지 않아도 효행을 준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널리 퍼뜨리면서 1차 단발령처럼 큰 저항은 없었지만, 자발적 참여가 저조해지자 1902년 군인, 경찰, 관원 등 모든 관리들이나 군사들에게 강제로 상투를 자르게 하고 서양식 복장으로 관복을 변경했어요.
즉, 정책의 뒷배경에 의도가 의심스러운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첫 단발령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고 스스로의 필요성을 자각한 상태에서 두 번째로 진행한 단발령은 성공적으로 정착한 셈이죠.

그러나 끝내 지방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단발이 보편화하지 않은 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아요.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딱히 다시 단발령을 다시 시행하지 않았고 상투를 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뒀어요.

다만 학생들이나 순사 같은 경우엔 무조건 단발을 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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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노년층 중에서는 여전히 기존의 상투를 한 사람들이 존재했어요.

1960년대까지도 가문의 뼈대를 자랑하는 양반 유림들 중에서도 상투와 갓을 고수하는 소수가 있었는데 이들도 늙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1970년대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서구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상투 차림은 급속히 사라졌어요.

비슷한 시기 서양권에서는 락과 영 패션이 유행한 시기로 다양한 머리 스타일이 나올 때 다시 남자의 긴 머리가 잠깐 유행을 한 적이 있지만, 1970년대까지만 어느 정도 유행을 했고 사그라들었죠.

개성이 중시되는 요즘 사회에는 긴 머리가 좋다며 기르는 남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자보다는 짧게 유지하고 있어요.

지금은 남자가 머리가 길면 위화감이 들기도 하고, 많은 여자들도 남자가 머리가 긴 것보다는 짧고 깔끔한 것을 선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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