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는 언제 생겼을까?

치통 때문에 치과에 가본 적 있으실 겁니다.
머리, 목 등등 다른 부위가 아플 때는 조금 쉬면 나아지겠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치통의 경우 말이 다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악화돼서 치과를 빨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치과가 없었을 시절에는 치통을 어떡해 해결했을까요?

두둥따)

고대 치과
수렵-채집 사회가 농업 사회가 될 때까지 심각한 충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초기의 인간은 충치의 고통 없이 지냈을 것인데 그 이유는 먹었던 음식에 정제당이 없었기에, 우식은 상대적으로 드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통과 다른 치아 질병은 아주 많았는데요?
대부분의 문제는 치아의 과도한 마모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강한 턱 근육과 절구통에서 나오는 모래, 진흙, 자갈이 섞인 거친 음식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선사시대 문화의 유해에서 발견된 치아에는 극단적인 마모가 관찰됩니다.
치아는 너무 닳아서 치수가 노출되기 일쑤였는데, 심한 치은염(치은 질환)의 표시인 골 상실 또한 유해에서 관찰되었습니다.

농업 사회가 될 때 식단의 변화에 탄수화물이 크게 증가하면서 충치의 발생이 시작됩니다.
초기 사람은 원시적이지만 또한 꽤 똑똑했습니다.
신석기시대 두개골을 조사한 결과 최소한 한 명, 아주 초기 치과 의사의 솜씨가 드러났습니다.

처음으로 치아의 치료라는 개념이 탄생한 곳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있는 갠지스 강 부근이라고 합니다.
약 8000년 전 누군가 이를 치료하기 위해 충치를 제거하는 ‘목제 활식 드릴’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000년경의 수메르 문헌에서는 충치의 원인이 치아에 살고 있는 벌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치아에 사는 사악한 벌레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점토판을 가져가고 아침에 날 부르시오.” 바빌론에서 치통을 겪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조언이었습니다.
몇몇 보고에 따르면 바빌론은 최소 기원전 5000년부터 치통과 싸웠으며, 그들의 치료법은 설형문자판에 기록되었습니다.

니네베의 아슈르바니팔 왕의 도서관 및 아시리아, 니푸르, 우루크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바빌론인은 치통에 대해 귀신과 벌레 모두를 탓했습니다.
초기에는 벌레가 치아에 구멍을 뚫는다고 생각했고, 이후의 이론에서는 그 형태가 자발적으로 생성되기에, 부패라는 의견이 우세해졌습니다.
치통을 앓는 자는 기도를 통해 고통 해소를 직접 기원할 수도 있었는데, “오, 샤마시여, 내 치아가 나를 상하게 합니다. 제물을 바치지 않은 귀신이 분노한 탓 이리다. … 당신에게 기도하오니 그를 멈추소서. 나방처럼 그를 덮으시어 그가 치아를 상하지 못하게 하시고, 치아로 인한 괴로움을 멈추게 하소서”와 같이 기도했습니다.
요청의 응답을 받은 자들은 이전에 고통받은 자들처럼 사원에 진흙 서판을 걸고, 그들의 고통과 무엇이 그를 치료했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사제들은 이들 점토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추렸는데, 이 개론서는 역사 이래 최초의 의학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점토판 중 하나에는 현재 이갈이라고 부르는 증상의 치료법이 적혀 있다.

… 사람의 두개골을 구하라. 사과색의 양피를 구해 의자 사이에 펴라. 두개골을 그 위에 올려라. 사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두개골에 제물을 바치고 주문을 일곱 번 암기하라. 환자는 끝내기 전까지 일곱의 일곱 번을 두개골에 입 맞춰야 한다. 그러면 나을 것이다.


기원전 3000년 덴마크에서도 충치를 치료받았던 흑적이 있는 치아가 있습니다.

고대의 중국은 야-통(ya-tong)이라고, 한국어로는 치통과 우식에 대해서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치의학에 대해 앞선 문명을 형성했던 그들은 동시대의 어떤 문화보다 구강 질병에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국 의학의 시조는 ≪황제내경≫ 또는 ≪의학 규범≫으로 여겨지는데, 기원전 2700년경에 작성되었다고 하며, 기원전 3세기 전까지는 현대의 형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 의학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는 신농씨(기원전 3700년경)는 치아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의 책 ≪신농본초경≫25)은 의학 치료법의 보고다(이 책은 1950년대 중반까지도 개정되어 재출간되었다).

치통의 완화를 위해 그는 구강 양치액과 안마, 한방 치료, 하제, 침술을 추천했습니다.

중국 의학 서적은 치통의 아홉 가지 유형을 구분하고 있으며, 잇몸 질환을 일곱 가지로 구분하여 보충하고 있습니다. 충치, 즉 빈 치아는 와동 형성의 벌레 기원설에 대한 예시이나, 체액설 또한 힘을 얻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고대의 중국 의학 전문가는 ‘과도한 성적 행위’ 때문에 치아 질병이 발생한다고 믿었습니다.

성관계를 하면서 입에 체액이 고갈되거나 부자연스럽게 많이 나오는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통의 치료는 이성적인 방법과 기발한 방법이 불가사의하게 결합된 양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조언을 하나 보면 “마늘 조각을 구워 이로 으깬다. 고추냉이 씨나 후추를 다진 것에 모유를 섞고 반죽한다. 알약의 형태로 만들어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 반대쪽의 콧구멍에 넣는다”.

다른 부위의 통증과 마찬가지로 침술 또한 치료법으로 추천되었다.

아마도 시행된 지 가장 오래된 치과 또는 악안면 수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침술사가 찌르는 신체의 388 부위 중 26곳은 치통을 완화하는 부위였습니다.

일본의 치과 기술은 중국과 유사했으나, 치통의 치료를 위해서 불로써 불을 다스리는 방법인 뜸에 더 익숙했다.

염증이 생긴 구강 조직은 뜸쑥, 면, 양털 뭉치나 다른 연소성 물질을 해당 부위에서 태워 지졌습니다.

발치는 맨손 가락으로 행했다고, 시술은 나무판에 박힌 나무못에 대고 연습했습니다.


초기 이집트인들은 부적을 착용했습니다.
기원전 2,600년 경 이집트에서 Hesy-Re라는 이집트인은 최초의 치과의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4,500년 전에 치과 의사와 다른 종류의 의사가 뚜렷하게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의료 전문가 100명 중 6명이 치의학과 관련이 있었다고 합니다.

Hesy-Re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특별히 장식된 무덤을 받았습니다. 
이 영예는 파라오가 Hesy-Re를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주는데, 불행히도 그가 칭찬을 받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수 탄생 전 천년 동안에 치의학적으로 발달한 문명이 이탈리아에 나타났고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700년 이탈리아 지역 지금의 토스카나에서 에트루리아인은 이를 뽑고 나서 그 치아를 대체할 수 있는 인공치아 치료를 했고 브리지 치료를 했습니다.
이미 에트루리아니은 동물의 이빨과 금박을 이용해 의치를 만들었습니다.
이가 빠진 곳이나 치아가 흔들리는 경우 금박을 이용하여 고정했고, 인공치아로는 동물의 이빨 중 황소를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앞선 로마의 이웃인 이들 종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치과적 관점에서 이들은 매우 발전한 상태였으며, 자연 치아와 금 고리로 만든 훌륭한 브리지는 “초기 치과 보철 장치에서 가장 큰 공헌”이라고 불립니다.

오늘날의 브리지 치료는 에트루리아인이 썼던 치료 방법 그대로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이 정도 수준으로 정교하게 수복하지 못했고 상태가 악화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술과 기도에서 치료법을 찾았으며,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포드하악골)


로마인들의 치과 작업물 견본 몇 가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고인을 화장하기 전 보철물을 제거하고, 화장한 시신에게 돌려줘 함께 매장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나라에서는 이것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치아 장치를 제작하는 데에 금이 사용되었으며 로마는 귀금속을 공급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슈가 되어 기원전 450년에 로마 최초의 법 중에 “금이 시신에 부가됨을 금한다. 그러나 우연히 치아에 붙은 금을 그것과 같이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명시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치아에 영구적으로 부착된 금은 그 자리에 두어도 되지만, 금이 사용된 가철성의 치과 보철물은 화장과 매장 전에 제거해야 했습니다.

이 법은 치의학에 대한 로마의 첫 기록이다.


서기 1 세기 전에 치통에 대한 치료법이 개발되었습니다.

서기 1세기에 로마의 자연주의자 장로 플리니는 자정에 개구리를 찾아 고통을 없애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서기 50년경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의사는 치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에 불타는 숯에 특정 씨앗을 뿌린 다음 입으로는 뜨거운 물로 헹구고 나서, 숯에서 나오는 연기를 흡입하게 했는데, 이빨 벌레로 믿어지는 것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금, 크라운과 교체 교량을 포함한 치과 보철물은 서기 166년에 등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히포크라테스 또한 치아 건강에 대해 기구를 사용한 치아 추출, 충치 치료 및 치아 안정화, 턱 골절 고정을 위한 와이어를 사용한 절차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교해부학 연구의 창시자로서, 그는 책의 한 부분을 온전히 동물의 각부(De partibus animalium)라는 주제로 채웠는데, 구강 조직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연구가 담겨 있으나, 제목이 알려 주는 것처럼 사람의 치아가 아닌 돼지 치아를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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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고문

서기 500년에서 서기 1100년까지 승려들은 교육을 잘 받았고 훈련을 받았으며 당시의 일부 수술을 했습니다.
하지만 충치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결국 승려들은 이발사에게 의학을 가르쳤으며, 수술과 치과 치료에 배정하여 치료하게 했습니다.
이발사는 나머지 작업, 특히 피를 닦고 치아 적출을 처리했습니다.

1163년에 교황은 수도사들의 모든 수술을 중단하고 이발사들에게 각종 수술을 하게 했습니다.
이발사들은 결국 칼과 면도기에 매우 능숙해졌습니다.

1300년대에 이발사 단체가 설립되어 이발사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기술과 절차를 수행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과 피를 닦고 발치를 하는 강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장장이의 주조소에서 나온 펜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였습니다.

이발사는 종종 박람회에 가서 고통 없는 이를 잘 뽑는다는 광고를 했습니다.
객석에서 연기자가 치통이 심한 척하며 무대에 올라왔고, 이발사는 치아를 뽑는 척하면서 이전에 손바닥으로 가린 피 묻은 어금니를 보여주었고, 치통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치아가 충분히 느슨한 경우 이발사는 치아 주위에 실을 묶고 치아를 뽑기 빠르게 잡아당겼는데, 이것은 (치과 기구) 플라이어보다는 안전하고 덜 고통스러웠습니다.
플라이어는 종종 다른 치아와 때로는 턱을 부러뜨렸고, 감염되기 쉬웠으며 일부 사람들은 출혈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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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충치의 부상
1400년대에 정제된 설탕은 유럽에 도입되었지만 부유층의 식탁에만 도달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과자를 씹으며 치통을 겪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치통을 덜 겪었습니다.

Artzney Bucklein이라는 이름의 독일인은 1530년 치과에 관한 첫 번째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는 구강 검진, 위생, 질환에 대해 설명되어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검은 이빨로 유명했습니다.
앞니가 빠져 푹 꺼진 잎술 형태가 고민이었는데 입술 밑에 천을 여러 겹 채워서 볼륨감을 만들어 얼굴 모양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중세시대 의사들은 잘못된 지식을 굳게 믿고 있었는데, 상한 치아가 만병의 근원으로 여기고 이가 상하면 무차별적으로 뽑았습니다.
아직 마취가 없던 시절인데, 이를 뽑는 장면이 서커스처럼 하나의 구경거리였다고 합니다.

안톤 판 레이우엔훅(Antony van Leeuwenhoek)은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현미경의 발달과 미생물학의 정립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1683년 그는 스스로 렌즈를 갈아 만든 현미경으로 박테리아를 발견했습니다.

이전까지 이때까지 벌레가 충치의 원인으로 여겨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인 삐에르 포샤르(Pierre Fauchard)를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서양 치의학의 역사에서 피에르 포샤르가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삐레르는 치과 해부학부터 구강 수술 및 회복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교과서를 발표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C%97%90%EB%A5%B4_%ED%8F%AC%EC%83%A4%EB%A5%B4

조지 워싱턴은 치아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는데 독립전쟁이 끝나고 그의 치아는 정말 빠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의 친구인 치과의사가 조지 워싱턴의 치아를 해결하기 위해 흔들리는 치아를 다 뽑고 의치를 만들어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지 워싱턴은 22세 이후 매년 발치를 했고, 상아 틀니를 착용하게 되는데, 틀니를 착용하게 되면 입이 평소보다 더 튀어나와 뚱-한 얼굴로 보였는데 그게 큰 불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지 워싱턴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틀니를 가졌다고 합니다. 
하마 앞니로 깎은 틀니, 죽은 사람의 이를 뽑아 만든 틀니 이러한 틀니 제작으로 치과의사 주치의도 10명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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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치과의 발전

치과는 언제 생겼을까? 1
1800년대 야전치과


치과진료에 최초로 마취제를 도입한 사람은 미국인 치과의사 호레이스 웰스입니다.
어느 날 웰스는 서커스 공연을 보러 갔다가 웃음 가스를 알게 됐는데, 웃음 가스라는 아산화질소를 마신 사람이 넘어져서 피가 나는데도 아픈 줄 모르는 것을 보고, 1844년 웰스는 자신이 직접 웃음 가스를 마시고 이를 뽑아봤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845년 종합 병원에서 웃음 가스 효과를 시연하던 웰스는 환자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아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고, 이에 실망한 웰스는 새로운 마취제를 찾다가 클로로포름에 중독되어 환각 상태에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황산을 뿌리고 감옥에서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웰스의 조수 윌리엄 모턴의 연구로 1846년 에테르라는 성분으로 마취제를 방명했습니다.
마취제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술에 취해서 고통을 덜거나, 진정제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알프레드 폰스(Alfred Civilion Fones, 1869∼1938)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치과위생사라는 명칭을 창안한 사람입니다.
1890년에 뉴욕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치과의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리지포트 시에서 개원의로 활동하였다.
폰스는 그 당시에 새로운 개념이었던 구강위생과 예방치의학의 중요성을 선각하고, 이를 대중운동으로 이끌어낸 선구적인 지도자이자 사회개혁가였다.

그는 1906년에 자신의 사촌이자 조력자였던 아이린 뉴먼(Irene E. Newman, 1875∼1958)에게 어린이의 치아 청결 법과 구강질환의 예방법을 가르쳤는데, 이 여성이 훗날 세계 최초의 치과위생사로 기록된 사람입니다.
폰스는 어린이의 올바른 구강건강 행동이 평생의 구강질병을 예방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사회적 실천으로 구현하였습니다.

그는 지역사회의 어린이를 위한 구강위생프로그램을 시행하여 어린이의 치아우식증 발생률을 크게 감소시킴으로써 예방처치의 중요성과 치과위생사의 가치를 입증했습니다.
그는 치과위생사 학교를 창설하기 위하여 46,000달러를 모금하고 첫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는데, 34명의 지원자 가운데 학교 교사, 간호사, 의사의 부인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폰스는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드디어 1913년, 미국 코네티컷 주의 브리지포트 시에 소재한 워싱턴 거리 10번지에서 세계 최초의 치과위생사 양성기관인 Fones Clinic을 개설했고, 이 학교는 비록 폰스의 허름한 차고에서 개설하였지만 교수진만은 쟁쟁했다고 합니다.
펜실베이니아 치과대학과 하버드 치과대학의 학장을 포함하여 예일대학 치대 교수가 7명, 컬럼비아 치대 교수가 2명, 그 외에 많은 임상 치과의사가 이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교수진 가운데 일본의 치과의사도 미국으로 초빙이 되었을 정도였다.

이 기관에서 1914년 6월 5일에 드디어 2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폰슨의 사촌인 아이린 뉴먼입니다.
이 졸업생들은 대부분 브리지포트 시의 초등학교에 취업하여, 어린이의 구강보건교육과 치아우식증 예방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뉴먼은 1917년에 코네티컷 주에서 세계 최초로 치과위생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이후에 코네티컷 주 치과위생사협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폰스가 자신의 낡고 작은 차고에서 시작한 교육기관이 이후에 멀지 않은 브리지포트대학교에 정규 교육프로그램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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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이전까지 한의학과 민간요법을 이용해 구강병을 치료해왔습니다.

한국에 치과치료가 시작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1884년 9월 20일 한국에 처음 온 의사이며 선교사였는데, 그는 자신의 활동에 관련된 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조선 체류기(Things Korean)’가 바로 그것인데요?
여기에는 한국인들의 생활상과 관련된 일화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인이 아침에 일어나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중 ‘의학 노트’에 ‘치아’라는 글이 있는데, 이것은 서양인이 쓴 최초의 한국인에 대한 치과 기록이 됩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치아가 몹시 아프다고 불평을 하면서 찾아왔는데, 그 사람을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 아픈 치아를 뽑아 버리자고 권했습니다.
그렇게 권하면 환자들은 곧 가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 사람은 놀랍게도 바로 동의했습니다.
알렌은 자신이 받았던 외과 수업을 기억해 한번에 치아 2개를 뽑아 버렸습니다.
그날 늦게 알렌은 병원 문을 닫기 전에 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기가 꺾이고 말았다고 합니다.
알렌은 멀쩡한 치아 1개를 썩은 치아와 같이 뽑아 버렸기 때문에 호된 욕을 먹을 줄로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처의 치아 몇 개를 뽑아 달라고 처를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 한국 사람으로 그렇게 아프지 않게 한꺼번에 치아를 2개씩이나 뽑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알렌은 많은 이를 뽑게 되어 오히려 이 뽑는 일이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글을 통해 한국인은 치과 치료로 치아를 뽑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알렌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국소마취약으로 프로카인을 사용했으니, 국소마취 후 발치가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때까지 그와 같이 아프지 않게 발치한 일은 처음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알렌이 시술하던 발치겸자는 현재 연세대학교 의학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이후 만 1년 동안의 알렌의 보고서에 의하면 1885년 4월부터 1886년 4월까지, 충치 60례·구내염 55례·치통 15례, 이외에 구개종양 1례·중설 1례·하악골괴사 치료 6례·구순파열 1례·순열 30례·구강저에서 분리된 혀 1례·구강폐색 3례·협부농양 3례·치아농양 5례·구순궤양 2례·발치 15례의 수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치의학의 외과적 치료가 행해졌습니다.

에비슨의 1901년 보고서에 의하면 274개의 치아를 학생 조수가 발치하였고, 어려운 예는 자신이 직접 발치하였다

이들은 전문 치과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치아우식증이나 치주질환이 말기에 이르렀을 때 발치를 하거나, 질병이 더 진행된 상태에서 외과적으로 수술하는 정도에 그쳤다.

입치영업자의 등장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치과술도 소개되었습니다.

일본인 노다 등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1902년 고로리가 충무로에서 입치사로 개업을 했고, 1904년 미나미치는 목포에서 개업했습니다.

이들 일본인으로부터 기공 기술을 배운 입치영업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1907년 최승용은 종로에서 처음으로 치과를 개설한 이후, 안중수(1907), 김한표(1908), 김경집(1908), 신정휴(1908) 등이 개설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치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1910년경까지 한국인 정규 치과의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초기 치과의원의 명칭
1900년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치과의원은 흥미로운 명칭이 많는데, ‘치과’보다는 ‘이해 박는 집’, ‘잇방’, ‘치방’, ‘치술원’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선교 치과의사의 내한
1906년 감리회의 선교 치과의사로 한국에 왔던 한(Hahn)은 1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한국에 치과의사가 한 명도 없는 점에 놀라 청년들에게 개인 지도를 하는 한편 치과의학교의 설립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남대문 근처의 집에서 치과 진료소를 열었는데 일부 학생에게 교육을 시켰지만 정규 치과의학교로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외에도 1910년대 초 박교상이 사동 민제병원에서 치의사라는 명칭으로 치과 치료와 입치를 시술하다가 독립하여 치과의원을 개설하고 치과의 모집을 하였으나 특별한 성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공사립 치과 진료 기관의 조수 또는 보조원들이 5년 이상 틈틈이 기술을 연마하면 입치영업면허와 치과의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해 주었다.

치과의사 면허 1번 함석태

일제는 1913년 11월 15일 치과의사 규칙을 발표하고 1914년부터 법령을 실시했는데, 1914년 2월 5일 함석태(1889~?)에게 치과의사 면허 1번을 부여하였다.

함석태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으며,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치과의사 면허를 받은 후 6월 함석태는 삼각동 옛 제창국 자리(현 조흥은행 본점 동쪽)에 한성치과의원을 개원하였다.

함석태에 이어 1917년 한동찬이 평양에, 1919년 김창규가 광화문에, 1921년 이희창이 무교동에 각각 개업했으며, 1922년에는 임택룡이 세브란스병원 치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치과학교실의 탄생

치과는 언제 생겼을까? 2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쉐플리(1915). ⓒ동은의학박물관


1915년 내한한 미국 북장로회의 윌리엄 쉐플리(W.J.Sheifley)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한국 최초의 치과학교실을 설립하고 진료와 함께 4학년 학생들에게 치과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917년 당시 치과학교실에는 의사 2명이 조수로 근무했으며, 4학년에 주당 1시간 배정된 <치과학> 강의는 일반 의사를 위한 치과 병리, 주요 치과 질병, 발치 등을 가르치고 시범을 보여 주는 내용이었으며, 관심이 있는 일부 학생들에게 특별 과정을 개설하여 가르쳐주었습니다.

한편, 대한의원이 설립된 후 1909년 11월 진료 과목에 치과가 설치되었지만 담당 의사는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총독부의원에서는 1911년 외과의 한 분야로 치과가 포함되었다가 1916년 독립되어 초대 과장서리로 나기라가 임명되었습니다.

치과의학교의 설립
1921년 에비슨은 치과의전문학교의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치전을 세브란스의학전 문학교, 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종합대학을 설립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를 이를 ‘일본인의 체면에 관한 일’로 규정하여 묵살하고, 총독부의원의 치과 과장인 니기라로 하여금 치과의사 강습소 설립 청원서를 내게 한 후 이를 허가했습니다.

니기라가 1921년 12월 26일 제출한 경성치과의학교의 설립 인가 신청서는 1922년 4월 1일부로 인가되었고, 4월 15일 이미 모집된 60명의 신입생으로 개교식을 겸한 입학식을 거하였고, 이 중에서 한국인 20명과 일본인 8명 모두 28명이 1925년 4월 첫 졸업생으로서 배출되었다. 이후 8회까지 한국인 102명, 일본인 7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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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치의학교 실습실(1920년대)과 경치전 정문(1940년대). ⓒ동은의학박물관

한성치과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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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학전문학교의 치과 외래 실습(1924). ⓒ동은의학박물관

1921년 10월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조선치과의사회를 만들었는데, 일부 한국인 치과의사가 참여했을 뿐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여러 면에서 일본인 치과의사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차별을 받았다고 합니다.

1925년 경성치과의학교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되자 함석태는 안종서, 김용진 등 한국인 치과의사 7명을 규합하여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 모임인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유일한 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교는 1931년 3월 일본 문부성 지정 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이후 해방되던 해까지 치과의학전문학교에서는 한국인 452명, 일본인 100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일제 시기 치과의사를 배출하던 유일한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등에 설치된 치과에서 진료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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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치과의사회의 후원으로 1931년 10월 낙성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치과학교실 ⓒ동은의학박물관


11개의 치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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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의 명함.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동은의학박물관


해방이 되고 국대안으로 국립서울대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치과대학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4년제였지만, 1959년부터 6년제로서 치의예과가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한 동안 한국에는 1개의 치과대학만이 있었지만, 1960년대 말에 2개 치과대학이 만들어졌고, 1970년대에 6개, 1980년에 1개, 그리고 1994년에 1개가 신설되어 현재 한국에는 11개의 치과대학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처음에는 4년제였다가 1959년 치의예과 신설), 경희대학교(1967), 연세대학교(1968), 경북대학교(1974), 조선대학교(1974), 부산대학교(1979), 원광대학교(1979), 전남대학교(1979), 전북대학교(1979), 단국대학교(1980), 강릉원주대학교(1994).
(괄호 속은 치의예과 신설 연도)
지금은 11개의 치과대학은 41개의 의과대학에 비해서는 수가 적지만, 수요에 비해 치과의사가 너무 많이 배출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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